1  수필--<생의 마루턱을 넘어서면서> 이현복 288 2005-08-10
생의 마루턱을 넘어서면서

이 현 복

(1)
그 누군가가 “거울을 보고 주제를 파악하라.”고 일러 주는 사람이 있다.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날이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는 거울을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이 그대로다.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눈에 익은 한 늙은이를 발견한다.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윤기를 잃어가던 머리가 온백이다. 쪼골쪼골한 얼굴이 재미있어 웃음을 지었더니 입가는 물론 눈초리에 고랑이 더욱 선명하다. 눈꺼풀은 탄력을 잃고 내려와 눈동자를 덮어간다. 눈 밑에 덧살이 풍성하다. 양옆 입꼬리는 화난 사람의 눈초리 같이 여덟팔자가 뚜렷하다. 씩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슬픔을 품은 표정이다. 까만 얼굴에 왠 점은 그리 많아졌는지. 사람은 늙어갈수록 왜 추물로 변해야 하나? 거울이 없는 세상에 살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잠간 스쳐간다.
하지만 거울은 자의던 타의던 하루의 거의를 거울과 함께 산다고 할 만큼 매력 있는 도구다. 마음껏 자기 자신을 비추기 위해 끊임없이 거울과 맞주한다. 때때로는 자기 자신에 도취될 수 있게 만드는 매력적인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거울이 있다. 나 역시 거울 앞에서 살았다. 그런 거울이 오늘 따라 눈 설다.

(2)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얼굴은 생의 이력서요, 자신의 단면도라 했다. 지금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거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 했다. 겉에 드러난 얼굴은 감추어진 마음보다 더 맑을까, 흐릴까? 관상(觀相)이 삼상(心相)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얼굴은 늙으면 추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얼굴이 추해지면 마음도 추해지는 것일까. 왜 늙으면 모습이 추해질까. 어느 날 이 세상과의 이별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석가는 태자였을 때, 화려한 궁전에서 젊고 아름다운 궁녀들과 살다가, 어느 날 근교를 산책하면서 이빨 빠지고, 주름투성이의 허리 굽고, 삐적 마른 노인을 보았다. 태자는 추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뭐냐고 물었다. ‘노인’이라 대답하고 사람은 오래 살면 저런 노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 설명을 듣자, ‘자 돌아가자. 호의호식과 환락이 무슨 소용 있는가. 내 몸 자체가 예비노인이 들어 살 집인 것을.’이라며 대오각성하였다고 한다.
생각한다. 만약 생사병로의 자연의 순리가 없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고 허둥대면 탐욕의 삶을 살 것이 아닌가. 서서히 변해간 나의 얼굴은 그 어느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차근차근히 그 준비의 가르침이다. 조금씩 조금씩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 가는 나를 보며, 버림의 미학을, 헤어짐의 미학을 깨닫는다. 그래 이제부터는 덜어가야 한다. 멀어져야 하고, 버려야 한다. 높아가는 안경의 도수, 때때로 멍멍해지는 귀, 틀니로 잃어가는 입맛, 탈력 잃은 피부, 어깨 걸림, 허리가 굽었다고 좀 쭉 펴고 다니라는 집 사람의 말이 이를 말해 주지 않는가? 더욱 확실한 증거는 깜박깜박 잊음이다. 근래에 커피주전자를 몇 개나 태웠는지? 벗어놓은 안경을 못 찾아 집 구석구석에 준비해 둔 안경의 의미을 생각한다. 전철 매표소에 가까이 가면 미리 승차권을 내 준다.
정신세계마저 흐릿해지고, 참여보다는 바라봄에서 편함을 생각한다.나 자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미리 저질러 놓은 삶의 단절은 쉽지가 않다. 외모의 추해짐에 맞추어 정신까지 늙어간다면 더 초라해 질것만 같다. 꿈이 남아 있는 한 마음의 주름은 더디 온다고 누군가 한 말을 믿고 싶다.
꿈, 꿈속에서 살았던 젊은 날이 아련하다. 인생이 무한하게 느껴지고, 온통 신비 속에 묻혀 삶이 뜨겁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고 살아왔다. 살아왔다기 보다는 쫓기며 밀려 살아온 있음이었다. 이렇게 있어왔기에 이제 초연한 입장에서 차갑게 흐르는 물속을 드려다 보듯 흘러온 인생을, 흘러가는 인생을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 요절한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빌었지만 나 같은 범인에게는 어디 그리 쉬운가. 쉽지 않음을 본다. 주변 사람들의 삶과 말년의 모습은 갖가지다. 참회의 고행길을 가는 사람, 욕망의 노예로 사는 사람, 생을 포기한 거리의 사람, 삶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스스로 생을 버린 사람, 주어진 일을 숙명으로 알고 열심히 제 길만 가는 사람.들....모두가 자신의 양심과 부끄러움과 자책감으로 고뇌 찬 사람들 아니면 후회 없는 자아실현의 보람찬 사람들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삶에 지처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의 진실에 눈을 떠서인지 조용한 시간이면 삶의 마루턱에 올라선 마음으로, 아침 풀잎의 이슬처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소리 없는 회한의 눈물을 짓기도 한다.
나의 인생, 유치 찬란하기도 하고, 호화 찬란한 때도 있었다. 유년시절의 순진을 넘기면서 청소년 시절의 꿈과 충동, 낭만과 방황, 대학시절의 방종과 허망, 청 장년시절의 소유에의 욕망을 지금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완전치 못했던 삶이 부끄러울 뿐이다. 내가 그 때 그렇게 미숙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그 때 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착각에 묻혔기 때문이였으리라. 그러나 지금 생각한다. 자랑스럽지는 못했더라도 저주스럽지는 않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 후회하게 하는 것, 반성하게 하는 것, 괴롭고 쓰라림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듯싶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요소들이다. 반성과 참회와 속죄거리가 없었다면 나는 자랑스런 나일지는 몰라도 그만큼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훗날 추한 것으로 변하고, 추했던 것은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하는 것이 또한 삶의 원리가 아닌가라고 자위하면서 <찻잔에 담은 인생>을 다시 읽는다.

(3)
다시 거울을 본다.
거울이 비친 얼굴은 추라하다. 아무래도 내 얼굴에 애착이 간다. 내가 만든 얼굴이고, 또 다듬어야 할 얼굴이다. 이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의 추함보다 마음속의 추함은 더 나를 서글프게 한다. 겉치례의 아름다움보다 마음속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진다. 이제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어 주는 얼굴이다. 그 때까지는 그래도 다듬어야 한다. 얼굴에 배인 사연들,내 삶에 말할 수 없는 생의 깊은 의미를 주었던 회한의 눈물과 속죄의 아픔, 정말 부끄럽고 쓰라린 일일지라도,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자. 그리고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자. 자신감을 갖자. 그러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도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지난 날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지위,명예 등등......허세, 위선, 체와 척.....성급과 분노와 나태와 경솔을 내려놓고,본래의 나로 돌아가면서 혼자서 시나브로 사라져 가는 내가 되어야 한다. 늙어서 죄를 짓는 것, 신세지는 것,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거리다. 가까운 거리에서 적당한 거리로, 다시 더 먼 거리로 그리고 더 멀리 잊어가며, 잊혀져 가며 살일이다. 흔적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거다. 인생은 준비의 과정이요, 그 연습이다. 고독의 미학을 배우고,그 속에서 영원히 나를 바라보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는 거다.이를 몸으로 익히면서 아름답게 헤어지는 연습, 떠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 시대에 잠시 머물렀다 간 사람으로서 적의 없고, 서운함 없이 후손들에게서만이라도 삶의 선배로서, 부모로서 섬김을 받는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이렇게 생의 마루턱을 지나서도, 우주의 섭리와 신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생명의 순환만은 알 것 같다. 나를 사랑하던 부모님, 조모님 다 돌아가시고, 성장한 자식들이 또 다시 부모된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며 서서히 물러가는 나이고 싶다. 걸림없는 마음으로, 미소머금은 고요한 표정으로 떠나고 싶다. 이 세상에 올 때 나는 울고, 주변이 웃었다면, 떠날 때는 나도 웃고, 주변도 웃었으면...... 이것은 기도다.
'관상(觀相)은 심상(心相)이다'.란 말을 음미한다.
“거울을 보고 주제를 파악하라.”말이 귀전에서 맴돈다.

김덕희 역시 수필가의 글이라서 물 흐르듯 유려합니다. 이동문의 자화상은 또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5-08-10 X
김현순 숨도 고루지 못 하면서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안겨 주는 글 이였습니다.남은 인생 살 면서 많이 참고 하겠습니다.감사 합니다. 2005-08-10 X
김태무 수필의 대가인 이교수의 글 잘 읽었소.
우리가 벌써 이렇게 인생 후반기에 와 있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도 드네.
남은 인생 후회없는 삶이 되도록 우리 다 같이 노력 합시다.		 2005-08-10 X
김원실 반갑음니다 좋은 글 잘읽었읍니다 김동문의 말씀처럼 남은시간 후회없는 삶이 되도록 노력 하겠읍니다 감사함니다. 2005-08-13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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